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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천재 사카모토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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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883회 작성일1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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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유럽에 엔니오 모리코네가 있다면 동양에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있다고 했다. 

 

 

누군가 유럽에 엔니오 모리코네가 있다면 동양에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있다고 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크리스마스>를 시작으로 두 번째 영화 작업이었던 <마지막 황제> 사운드 트랙으로 아카데미, 골든 글러브 등 주요 영화제의 음악상을 휩쓸었고, 이후에도 일본과 유럽, 할리우드의 영화 음악을 꾸준히 만들어왔으니 그런 느낌을 줄 만도 하다. 한편, 감미로운 피아노 음악을 연주하는 뉴에이지 아티스트의 이미지도 있다. 유튜브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찍어 넣으면 피아노 앞에서 그 유명한 영화의 주제곡을 열정적으로 연주하고 있는 그를 발견한다. 물론 엔니오 모리코네 역시 대단한 음악가임이 분명하지만, 뉴에이지 역시 아름다운 장르이지만, 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지나치게 성급하거나 게으른 수식어다. 만약 당신이 일본의 전설적인 록밴드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의 뿅뿅대는 곡을 한 번이라도 들어봤다면, 그리고 류이치 사카모토가 그 밴드의 멤버로 활동했으며 최근 다시 재결성하여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음을 안다면, 그리고 그가 앨범마다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나 젊은 뮤지션과 함께하는 작업에 우호적임을 발견했다면(심지어 한국의 MC 스나이퍼와 함께한 곡도 있다) '뉴에이지 아티스트' 혹은 '동양의 엔니오 모리코네'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전에 한번 더 머뭇거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한국 콘서트와 자신의 자서전 발간을 기념해 내한한 류이치 사카모토는 오히려 나보다 여유로웠다. "일본에서 제가 좋아하는 미국 팝 뮤지션 제임스 테일러의 공연이 있었어요. 그의 히트 송이 언제 나오나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다가 첫 번째 앙코르 송으로 그 노래를 불러주자마자 나머지를 듣지 않고 자리를 떠났어요. 하물며 저도 그런데, 관객이 내게 좀 더 쉽게 들을 수 있는 종류의 노래를 원하고 기억하는 건 당연한 것 같아요. 하지만 아티스트로서는 가끔 절망스럽기도 하고, 나의 실험적인 부분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죠. 제 에고를요. 아마 모든 뮤지션이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을 거예요."

 

 

최근 그는 자신의 자서전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를 출판해 자신의 삶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하지만 그는 책 프롤로그에서,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여러 번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고 거듭 말했고, 실제로 책에서 그가 왜 누구와 결혼했고 왜 이혼했는가 하는 종류의 가십류의 이야기, 좀 더 사적인 영역의 이야기는 거의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왜, 어떻게 뮤지션이 되었는지, 오로지 일관되게 음악을 중심으로 자신의 일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말미에 이러한 인간의 개인사를 읽어야 하는 독자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한다. "아, 이건 정말, 일본 잡지 <엔진>의 편집장 때문이었어요. 나한테 그냥 음악 이야기나 하는 인터뷰를 연재하자고 했어요. 나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만 얘기하자고. 나는 그와 얘기하는 것이 즐거웠고, 그 사람에게 인간적인 매혹을 느끼고 있어 승낙했지만, 결국 내 삶 전체에 대해서도 얘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가 나에게 거짓말은 한 건 아니었지만, 결국, 그 제안엔 트릭이 있었던 거죠(웃음). 하지만 아주 사적인 영역은 밝히지 않았어요. 저는 제 삶을 별로 공개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수줍은 그의 책을 펼치고 나니 나는 뜻밖에도 그의 '미안하다'는 말을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초반부터 우리의 콤플렉스를 심히 자극하는 '타고나길 천재'인 그의 삶은 사실 영재교육에 열을 올리는 열혈 학부모를 위한 학습 코너 서가에 꽂혀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일본의 유명 작가들의 책을 출판하던 편집인 아버지와 모자 디자이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선진적인 교육을 하던 유치원에 다니며 피아노와 처음 만난다. "그래요, 저는 정말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는 운을 타고났어요. 몇 년 후 보니까 친구들은 다 피아노를 그만뒀는데, 저 혼자 이걸 하고 있더라고요. 피아노 선생님은 저를 작곡 선생님께 보냈고 그분도 정말 훌륭한 분이었죠."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집에 쌓여 있는 인문 과학서를 어려서부터 탐독하고, 10대 시절부터 일본의 소위 문화 인텔리들과 교류한 그는 '별로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는데' 도쿄 대학에 입학한다. 그렇다고 그가 '샌님 모범생'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저는 사실 아카데미즘적인 사람은 아니었어요. 학교도 열심히 다니지 않았고, 굉장히 반항심이 많아서 언제나 새로운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생각하는 걸 주장하고 하려고 했어요. 록, 프리 재즈, 아방가르드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고 잘 컨트롤해보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시절, 전위 연극을 써서 무대에 올리고, 데모를 하러 다니고, 학생운동가들의 아지트 카페에서 진을 치고, 친구들을 선동하여 불합리한 학교 제도를 바꾸자며 장기 수업 거부를 부추기고, 결국 이를 승리(이를 통해 교복, 교모, 시험을 모두 철폐해버렸다)로 이끌던 반항적인 리더십과 배짱도 두둑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고등학교 때는 에드문트 후설을 읽고 친구들과 토론을 주도하며, 존 케이지, 백남준 등의 플럭서스 운동에 빠지고, 장 뤽 고다르의 메타 영화와 미니멀 작곡가인 테리 라일리에 경도되어 있었다니 뭐 이쯤 되면 어디 프랑스 철학가들의 삶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는 단순히 멜로디를 지어내는 작곡가가 아니다. 그래서 그러한 철학과 사유가 과연 음악을 만드는 데 중요한가? 만약 아티스트를 이론적인 방법을 사유하며 작품을 탐구하는 지적인 작가들과 지적임 호기심보다는 와일드한 평원에서 가슴에서 샘솟는 영감에 의지한 작가들로 나눌 수 있다면 그는 전자에 가깝다. "나의 평생의 궁극적인 질문은 언제나 '음악이란 과연 무엇일까'예요. 아직도 그 답을 모르겠어요. 음악을 하는 것은 정말 즐겁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만, 왜 사람들을 음악을 듣는가, 음악이 과연 뭐기에에 대한 답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건 제 본성인 것 같아요. 그것을 알기 위해 자꾸 책을 읽고 현상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모든 뮤지션들이 그러한 것을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자상한 아버지처럼 그는 가방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이패드를 꺼내 아마존에서 구입한 책들의 목록을 보여준다. "요즘에는 정말 오래된 클래식들을 읽고 있어요. 호머의 <오디세이> 같은 거. 버로우즈도 많이 읽고요." 

 

 

 

그의 다양하고 깊은 인문학적 호기심, 그만의 고집과 배짱은 그가 분명 음악이 아니라 다른 예술을 택했더라도 지금의 위치를 점하고 있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또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반복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음악이 내 길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해왔다. 심지어 YMO로 성공하고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로 그 유명한 곡을 히트시키고 나서도. "아, 저는 매번 영화음악 작곡을 하고 나서 '이번이 끝이야', '정말 안 해'라고 말해요. 사실 제 천성이 남한테 이래라저래라 지시를 받는 것을 너무나도 못하는 타입이라 더 그래요. 그런 의미에서 100% 프로는 아닌 거죠(웃음)." "지금 내가 쉰여덟에서 쉰아홉이 되고, 조만간 예순이 되는데 이제 다른 걸 선택할 날들이 그리 많지 않잖아요(웃음). 게다가 나는 아직도 50년 전의 나처럼 음악을 듣고 하는 게 너무 흥분되고 좋아요. 음악은 결코 정복할 수 없는 무한정한 세계니까. 그래서 다른 길을 찾아가는 걸 포기했어요. 죽을 때까지 음악을 한다고 해도 좋아요." 

 

 

 

그는 두 편의 세계적인 영화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사실 <전장의 크리스마스> 역시 영화배우로서 먼저 제안을 받고 '영화음악을 만들게 해주면 그 제안을 수락하겠다'고 세계적인 거장 오시마 나기사 감독에게 배짱을 부려 배우와 작곡가 두 가지 기회를 모두 잡은 일화가 있고, <전장의 크리스마스> 덕분에 칸 영화제에서 만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역시 그에게 <마지막 황제>에서 청나라를 압박하는 일본 장교 마사히코 역을 맡긴다(영화의 음악을 담당하게 된 것은 영화를 출연한 이후 우연히 생긴 일이고 심지어 엔니오 모리코네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의 말대로 '운' 터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연기란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야심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누군가와의 관계, 존경, 스토리에 대한 동의에서 이루어진 깜짝 쇼처럼 보였다. "그래요. 한번도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던 적도 없고, 제 의도도 아니었어요. 그 감독들의 탤런트, 예술적인 창조 방법이 매우 궁금했고 단지 함께 일해보고 싶다는 것이었을 거예요. 결국 그것이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기도 했고요. 그냥, '그들이 해볼래?' 했을 때, '설마, 정말? 그래 해볼게'의 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죠." 

 

 

 

놀라운 건 두 작품 모두 일본의 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하는 영화였다는 것이다. 그는 대놓고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인 견해를 표출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영화에 출연함으로써 그의 태도를 표현했고 최근 들어서는 자신의 앨범을 통해 미국의 9?11(그는 뉴욕에서 21년째 생활하고 있다) 등의 이야기를 담거나, 환경운동에도 참여하며 더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중이다. "한국에 대해서는, 음, 저는 정말 어렸을 때부터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많은 걸 생각했어요. 이미 되돌려 바꿀 수 없는 역사이니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의 관계가 더 나아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제가 정치인이 아니라 음악인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한국에선 고 백남준 씨가 거의 영웅이죠? 뉴욕에서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그의 가는 길을 애도했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베를린에서의 그 유명한 퍼포먼스를 행했죠. 모두들 넥타이를 잘랐어요. 사물놀이 김덕수 씨와는 30년지기 친구이고, 물론 MC 스나이퍼 같은 젊은 한국 예술인 친구들도 많고요. 아 요즘엔, 배용준, 카라도 좋아하죠, 하하, 농담입니다."

 

 

 

그의 솔로 앨범과 영화음악 작곡만큼이나 그의 이력에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의 활동일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그의 활동 중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고. 최근에 그 앨범이 소니 뮤직을 통해 다시 한 번 발매되기도 했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우리는 그가 젊은 시절 일렉트로닉 음악에 일본의 엔카, 저먼 록, 팝, 록을 뒤섞어 만든 실험적인 음악을 멋들어지게 연주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일본뿐 아니라, 유럽, 미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의 대표곡 중 하나인 'Behind the Mask'가 마이클 잭슨의 앨범에 수록될 뻔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세 멤버의 고집과 젊은 혈기는 몇 년 뒤 끝을 맺게 되고, 그로부터 몇 년 뒤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재결성을 하지만, 그의 표현에 따르면 '눈도 맞추지 않고' 공연을 하며 흐지부지된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 중년이 된 그들은 뾰족했던 마음을 다듬어 좀 더 지혜롭고 넓은 마음으로 스스로 다시 뭉쳤다. 나는 YMO로 한국에 다시 와달라고, 큰 콘서트홀 말고 클럽에서 보고 싶다고 징징댔다. "여름마다 유럽과 일본 등지의 록 페스티벌 같은 곳에서 공연을 하고 있어요. 정말 재미있죠. 가능해요, 정말 가능해요, 불러만 준다면(웃음)." 

 

 

 

YMO에 관련한 최근 가장 큰 이슈는 바로 'Behind the mask'가 마이클 잭슨의 사후 앨범 에 수록되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써 몇 십 년 전의 일이죠. 마이클 잭슨이 앨범을 만들 당시 그의 회사에서 저희 쪽에 연락을 취했어요. 그 노래를 우리가 리메이크해서 쓰고 싶다며, 하지만 그 음악에 대한 모든 권리는 100% 자신들이 가져가겠다고요. 뭐, 그래도 마이클 잭슨이 그 노래를 어떻게 불러줄까 싶어서, 그럼 내가 그 바뀐 노래를 들어볼 수 있겠느냐 했더니 안 된대요. 권리도 안 돼, 들어볼 수도 없어, 해서 안 하겠다고 거절했어요. 그랬는데 작년에 그쪽 회사에서 다시 연락을 해왔어요. 그리고 그가 당시 어린 목소리로 불렀던 'Behind the Mask'를 듣게 됐죠. 정말 25년 정도 뒤에야 들어볼 수 있게 된 거죠. 데모 테이프처럼 느껴지는 그야말로 날것의 노래였는데 아주 좋았어요. 제 권리도 공평하게 주겠다고 했고 그래서 수락을 했죠. 그랬는데 사실 지금 앨범에 수록된 노래는, 누가 편곡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주 달라요. 사실 나는 그 날것의 느낌이 더 좋았어요." 

 

 

 

그의 음악은 일본 전통, 혹은 아시아적인 색채도 간과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세련되게 포장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세계의 다양한 음악적인 트렌드를 냉철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일본 고유의 전통음악을 탐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 유명한 'Rain'이나 'Merry Christmas Mr. Lawrence'만 해도 그렇다.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동양과 서양의 가운데서 외롭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긴장감에 가득한 음악이다. 그 음악 자체로 현재, 아시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반추하게 한다. 그의 방대한 실험 속에서도 나는 꾸준히 그의 아시아인이면서도, 아시아에 대해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거리감을 느낀다. "저는 일본을 사랑하지만, 소위 말하는 애국자는 아니에요. 뉴욕에서 사는 게 좋은 것 중 하나는, 그곳에서 일본을 훨씬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에요. 그 안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훨씬 확연히 볼 수 있어요. 저는 음악에서 어떤 감정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다양한 감정들이 하나로 징집되는, 그 감수성을 보여주고 싶은데, 설명하기는 쉽지 않군요(웃음)."

 

 

 

그의 음악과 사유에 대한 열정, 혹은 탐욕은 과연 지금도 유효할까. 평생 휘몰아치는 도전과 변화를 향해 달리는 마라토너 같은 그도 숨이 턱에 차고, '내가 과연 뭘 위해 사나' 하는 슬럼프, 삶의 지루함이 엄습하기 마련일 텐데 말이다. "아, 저는 참 행운아예요. 음악에 대한 열정을 한번도 잃어본 적이 없어요. 아마 이게 직업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였을 거예요, 물론 이 덕분에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철들지 않은 10대 같은 구석이 있어요. 클래식, 콘템퍼러리, 재즈, 아방가르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듣고 있어요. 물론 어린 시절과는 다른 방식으로 음악이 나를 떨리게 해요. 음악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게 참 좋아요. 재밌는 건 어렸을 때 듣지 않았던 음악을 듣고 싶다는 거예요. 말러나 바그너 같은 낭만주의 음악을 싫어했었는데 요즘 거의 매일 말러를 듣고 있거든요. 재미있어요." 그래서,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행복하세요? "음,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고, 힘들고 어려운 일도 찾아오지만, 그래도, 그래요. 행복해요, 행복합니다." 

 

 

 

인터뷰를 끝낸 나는 상기된 얼굴로 류이치 사카모토에게 그의 자서전과 앨범, 그리고 미리 준비해간 은색 네임펜을 내밀었다. 그는 책을 슬쩍 옆으로 돌리더니 왼손으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위에서 아래로, 그러나 보는 사람에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 것처럼 보이도록. 과장되지만, 나는 그의 글 쓰는 방식이 그의 삶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다른 관점에서,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정도를 잃지 않도록 컨트롤하는 모습. 그리고 한편으로 그처럼 나이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겸손하게, 하지만 내면의 고집과 자존심, 배짱을 지키면서 유머러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