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사카모토 류이치, '암투병 서사' 없이도 뿜어냈을 온라인공연의 숭고함

등록 2022.12.11 19:18:33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류이치 사카모토 : 플레잉 더 피아노 2022'

라이브 콘서트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편집된 온라인 콘서트

거장의 음악 이력이 공들여 담긴 음악 다큐멘터리

내년 1월 발매하는 새 앨범 수록곡 '20220302 - 사라반드' 등 13곡 연주

[서울=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2022.12.11. (사진 = 씨앤엘 뮤직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2022.12.11. (사진 = 씨앤엘 뮤직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웅웅~ 난방기구가 돌아가는 소리, 치이익~ 가습기가 수증기를 내뿜는 소리, 거기에 어쿠스틱이 없는 공간에서 노트북 스피커로 감상해야 하는 환경….

이런 작은 부산스러움에도 일본의 세계적인 영화음악 거장이자 뉴에이지 피아니스트인 사카모토 류이치(70·坂本龍一)가 11일 오후 12시 공개한 온라인 콘서트 '류이치 사카모토 : 플레잉 더 피아노 2022(Ryuichi Sakamoto: Playing the Piano 2022)'는 막강한 흡입력을 자랑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주제곡 같은 대편성의 곡도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 한대로 소화한 이번 공연에서 사카모토는 독주 악기로서 피아노의 가능성을 극한으로 탐색했다. 일종의 피아노 소나타 공연이었던 셈이다.

60분 남짓의 러닝타임의 이날 온라인 공연은 실시간 스트리밍이 아니었다. 사카모토가 망설임 없이 "일본에서 가장 좋은 스튜디오"라고 장담하는 도쿄 시부야의 NHK 방송센터 509 스튜디오에서 하루에 몇 곡씩 정성들인 연주를 미리 영상으로 녹화했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편집했다.

사실 사카모토의 콘서트는 현장에서 시청각적인 것을 동시에 느껴야 하는 공감각적인 무대다. 실제 지난 2011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펼친 '류이치 사카모토: 플레잉 더 피아노-코리아 2011'은 피아노 소리와 흐릿한 빛의 흔적, 그리고 한 무리의 인간들, 이들의 조합이 빚어내는 희망의 메시지와 울림이었다.
[서울=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2022.12.11. (사진 = 씨앤엘 뮤직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2022.12.11. (사진 = 씨앤엘 뮤직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코로나 팬데믹이 세계를 관통한 지난 2020년 말 선보인 온라인 콘서트에선 회색빛 길거리와 폐건물 등을 덧댄 영상으로 몰입감을 극대화했다. 특히 대표곡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들려줄 때, 창밖으로 몽환적인 풍경이 보이는 푸른 방에서 연주하는 듯한 장면은 온라인 공연의 장점을 극대화했다.

그런데 영화 '리틀 부다'(Little Buddha·1993) 테마의 즉흥연주(Improvisation on Little Buddha Theme)로 시작한 이날 공연은 특별한 기교가 묻어나는 영상 연출이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도인처럼 연주하는 사카모토의 얼굴과 몸 그리고 악보줄 같은 선이 그어 있는 뭉툭한 손을 덤덤하게 비출 뿐이었다. 사카모토의 그림자를 비추는 정도의 연출만 있었다. 

이런 점은 오히려 음악 자체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여백의 미를 통한 명징함의 미학, 특히 삶의 끝을 향해 달려 가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음악이라는 노동을 하는 자의 숭고함이 듣는 이들의 심장을 파고들어왔다. '직장암 투병'이라는 서사가 없어도 그 자체로 훌륭한 연주들이었다.
[서울=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2022.12.11. (사진 = 씨앤엘 뮤직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2022.12.11. (사진 = 씨앤엘 뮤직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사카모토가 혼신의 힘을 다한 이유는 "라이브로 콘서트를 할 체력이 안 된다. 이런 형식으로 연주를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상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한국과 사카모토의 고국인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독일 등 세계 각지에 유료 스트리밍됐고 많은 팬들이 관심을 가졌다. 2년 전 온라인 공연 뒤 음악 작업 외 공개 활동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그다.

사카모토는 작년 직장암으로 전이된 사실을 공개하고 수술을 받았다. 일본 문예지 '신초'에 암투병 에세이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보게 될까'를 연재하기도 했다.

이번 온라인 콘서트 직전 공개한 2분29초가량의 영상에서 자신의 투병기를 담담히 전했던 사카모토는 총 13곡을 들려준 이번 온라인 콘서트에서 충분히 기대에 부응했다.

'락 오브 러브(Lack of Love)'는 불안한 변주로 긴장감이 넘쳤고,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 '토니 타키타니'(2005) OST인 '솔리튜드(Solitude)'는 고독한 영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껴안은 듯 적막감이 감돌았다. '오바드(Aubade) 2020'은 감상적이었다.
[서울=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2022.12.11. (사진 = 씨앤엘 뮤직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2022.12.11. (사진 = 씨앤엘 뮤직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최근 디즈니 플러스(+)의 한국 오리지널 '커넥트'의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된 개성 강한 일본 감독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 '할복: 사무라이의 죽음'(2011) OST '스몰 해피니스(Small Happiness)'는 관현악 곡인데 피아노 솔로로도 그 무게감을 살려냈다.

사카모토가 1998년 발표한 음반 'BTTB'(Back to the Basics)에 실린 곡이자 국내에서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곡인 '아쿠아(Aqua)'는 애상적인 활기로 가득차 아련함을 선사했다.

사카모토가 일렉트로닉 장르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그룹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시절 발표한 '통 푸(Tong Poo)'는 원곡보다 밝고 화려하게 연주하는 듯하더니 이내 침잠했다.

피터 코민스키 감독의 '폭풍의 언덕'(The Wuthering Heights·1992) 테마곡은 묵직한 단조의 향연으로 피아노 한대로 선사할 수 있는 스케일이 무엇인지 증명했다.
[서울=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2022.12.11. (사진 = 씨앤엘 뮤직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2022.12.11. (사진 = 씨앤엘 뮤직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20220302 - 사라반드(sarabande)'는 사카모토가 자신의 생일인 내년 1월17일 발매하는 새 앨범 '12'에 실리는 곡이다.

'12'는 사카모토가 계속되는 투병생활 속에서 일기를 쓰듯 제작한 음악의 스케치 중에서 12곡을 골라 한 장의 앨범으로 정리한 작품집이다. '20210310' 등 각 곡의 제목은 곡을 제작한 날짜로 정했다. 다만 8번 트랙 '20220302'에만 '사라반드(sarabande)'가 부제로 붙었다. 사라반드는 17~18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고전무곡을 뜻한다. '20220302 - 사라반드'는 클래식하면서도 세련됐고, 부드러우면서 무게감이 있는 수작이었다.

거장 감독 베르나르토 베르톨루치의 영화 '마지막 사랑'(The Sheltering Sky·1990) 테마곡은 피아노만으로 원곡의 격렬함을 뛰어넘는 에너지가 일품이었다. 베르톨루치와 처음 함께 작업한 '마지막 황제' 테마곡은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사카모토는 이 영화 음악 작업으로 아카데미상, 그래미 어워즈를 받았는데 그런 후광을 빌리지 않아도 강약을 오가는 유연함과 인생을 통찰하는 듯한 위용이 스크린을 휘감았다.

본 공연의 마지막곡은 사카모토가 팬들에게 미리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그가 첫 음악을 맡은 영화인 일본 거장 감독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 테마곡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이미 겨울 고전이 돼 버린 이 곡은 익숙함의 틈으로 비집고 나오는 설렘과 감미로움 거기에 너무 선율이 아름다워 빚어지는 애수를 선사했다.
[서울=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2022.12.11. (사진 = 씨앤엘 뮤직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사카모토 류이치. 2022.12.11. (사진 = 씨앤엘 뮤직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온라인 공연은 마지막까지 빈틈이 없었다. 역시 'BTTB에 실린 '오푸스(Opus)'가 엔딩 곡으로 울려퍼지는 가운데 이번 영상 작업에 참여한 이름들이 화면을 스치듯 지나갔다.

이날 온라인 콘서트는 단순한 스트리밍 공연이 아닌 거장의 음악 이력이 공들여 담긴 음악 다큐멘터리와 같았다. 고뇌에 찬 얼굴, 수심이 가득한 굽은 등, 삶의 곡절(曲折)을 곡절(曲節)로 만들어내는 비밀의 주름이 새겨진 손…. 이날 스트리밍은 편집된 온라인 콘서트가 실제 라이브 콘서트에 열등감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한 희귀한 경험이었다.

사카모토는 이렇게 직장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가운데도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글로벌 OTT 넷플릭스(NETFLIX)의 최신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디 익셉션'의 음악을 담당했는데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곧 발매 예정인 앨범 '12' 아트워크로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화가 이우환 씨가 이 음반을 위해 제작한 드로잉을 사용하는 등 앨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내년 4월14일엔 이번 온라인 콘서트 등의 내용이 담긴 다큐도 공개한다.

이번 스트리밍 콘서트는 이날 오후 6시에도 스트리밍됐다. 12일 오전 0시와 같은 날 오전 6시에도 온라인 전송되는 등 총 4차례에 걸쳐 스트리밍된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