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B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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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어린 시절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사카모토가 태어났다면, 르네상스맨(Renaissance Man)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나 그가 20세기 중반 일본에서 태어났으므로 작곡가, 음악가, 프로듀서, 배우, 환경 운동가같은 단어를 묶어야 한다.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 Ryuichi Sakamoto)는 1952년 1월 17일 도쿄 나카노에서 규슈 출신의 출판 편집인인 아버지 사카모토 가즈키(坂本一亀, 1921~2002)와 모자 디자이너인 어머니 게이코 사이에서 태어났다. 보수적이고 엄격한 아버지에 비해 클래식에 조예가 깊고 자유로운 사상을 품고 있던 어머니 덕에 그는 공립유치원이 아닌 도쿄 세타가야 구에 있는 자유학원 유치원을 다녔다. 이 유치원의 피아노 시간을 통해 서너살 때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고, 레코드를 많이 가지고 있던 막내 외삼촌 집을 들락거리며 다양한 레코드를 접하며 최초의 음악체험을 시작하게 된다.

1958년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개인 레슨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며 바흐를 좋아하게 된다. 1963년(초등학교 5학년)에는 레슨 선생님의 권유로 동경예술대학(東京藝術大学)의 마쓰모토 다미노스케(松本民之助, 1914~2004) 교수에게 작곡을 배우기 시작하고, 비슷한 시기 비틀즈와 롤링스톤즈를 좋아하게 되며 이들에게 많은 음악적 영향을 받게 된다.

중학교 2학년 때에는 외삼촌의 레코드 컬렉션에 있던 드뷔시의 현악 사중주를 듣고 충격을 받아 오랫동안 본인을 드뷔시의 환생이라고 믿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존 케이지의 음악을 접하며 현대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기존의 음악 제도나 구조를 해체하려는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아 '우리는 종래의 음악으로 막혀버린 귀를 해방하지 않으면 안된다'같은 생각을 하는 등 음악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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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O 결성 무렵
대학생~YMO

1970년 동경예술대학 음악학부 작곡과에 입학 후 서양음악의 한계를 느낀 사카모토는 서양음악 이외의 것에 시선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민속음악과 전자음악을 철저하게 섭렵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대학 3학년 때에는 아이가 생겨 같은 대학의 유화과 학생과 결혼했으나 얼마 후 이혼했다. 이로 인해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생긴 사카모토는 지하철 공사장 아르바이트, 주점의 피아노 아르바이트, 극단을 위한 작곡, 록이나 포크 뮤지션의 레코딩이나 라이브를 도와주던 중 도모베 마사토(友部正人)의 전국 투어에 동행하기도 하는 등 뮤지션으로서의 경험을 쌓아나간다. 전자음악과 민속음악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고 대학을 졸업한 1977년부터 사카모토는 일본의 유명한 락, 재즈, 클래식 아티스트와 함께 작곡가, 편곡가,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1978년에 솔로 데뷔앨범 Thousand Knives를 발표하고 하루오미 호소노(細野晴臣), 유키히로 다카하시(高橋幸宏)와 YMO를 결성하여 일본 국내외에서 인기를 얻게 된다. YMO의 2집 앨범은 1979년에 발매되어 100만장 이상 판매량을 자랑하며 성공을 거두고, 이어서 유럽과 미국을 도는 월드투어를 진행하기도 하는 등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와 함께 테크노팝의 선구자로 인정받게 된다. 이후 5년간 11개의 앨범을 발표한 YMO는 현재까지 계속되는 레이브, 테크노, 앰비언트 무브먼트를 발전시키며 이들 장르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 또한 널리 인정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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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미우와 함께

1980년에는 딸 미우가 태어났으며, 1982년 2월, 야노 아키코(矢野顕子)와 두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YMO 해산 전부터 다양한 장르의 사람들을 만나거나 함께 작업을 하기 시작하는데 철학자 오모리 쇼조(大森莊藏, 1921~1997)씨와 대담집 출판, 요시모토 다카아키와는 '음악기계'를 출판하기도 했다.

YMO를 통해 감당할 수 없는 인기를 얻으며 본인의 음악을 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된 사카모토는 YMO를 '가상의 적'으로 여기며 2번째 솔로앨범 'B-2 Unit'를 제작하기도 했으며, 결국 솔로로서의 활동과 월드뮤직의 추구를 위해 YMO를 탈퇴한다(1983년 해체된 YMO는 10년만인 1993년에 재결성되어 'Technodon' 앨범을 발표한 뒤 재해체되었으며, 2007년 HASYMO라는 이름으로 재결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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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사운드트랙 작업

사카모토의 여러 분야(jazz, bossa nova, modern classical, dub, gamelan)에 대한 관심은 YMO, 자신의 솔로 앨범, 그리고 1983년에 작곡한 Merry Christmas Mr. Lawrence등의 사운드트랙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내 머리속에는 서로 다른 문화 사이에서 유사점을 찾는 일종의 문화의 지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 대중음악의 목소리 톤과 떨림이 나에게는 마치 아라비아 음악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발리는 뉴욕과 가깝습니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그들 머리 속에 이런 지형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작업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다양성의 추구는 사카모토를 작가 윌리엄 버로(William Burroughs),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뿐 아니라 데이빗 보위(David Bowie), 데이비드 번(David Byrne), 데이빗 실비앙(David Sylvian), 이기 팝(Iggy Pop), 유수 운두르(Youssou N'dour), 로비 로버트슨(Robbie Robertson), 카에타노 벨로조(Caetano Veloso)등 다양한 아티스트들과의 작업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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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제

1986년에 6번째 솔로앨범인 Futurista을 발표하며 미래파에 대한 책 '미래파 2009'를 출간한다. 같은 해 마지막 황제의 촬영에 참가하여 일본군 대위인 아마카스 마사히코로 연기하던 중 감독으로부터 영화음악을 한 곡 만들어달라는 제의를 받게 된다. 촬영 종료 6개월 후에는 마지막 황제의 사운드트랙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아 도쿄에서 일주일, 런던에서 일주일 총 이주만에 작곡 및 녹음을 완료했으며 마지막 황제는 아카데미 상 9개 부문을 휩쓸게 된다. 1987년에는 민족음악적인 색채가 강한 Neo Geo를 발표하였으며, 다양한 문화를 믹스한다는 Neo Geo의 경향을 이어가는 앨범 Beauty를 발표하는 등 하우스, 힙합, 보사노바, 클래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시도하게 된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마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에서 영화음악으로 안소니 애스퀴스 상을 수상한 사운드트랙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일 것이다. 이후 베르톨루치의 1987년 작품인 마지막황제의 배경음악으로 LA 영화평론가협회(LA Film Critics Association)상 및 BAFTA(Best Original Score) 배경음악상, 오스카, 그래미, 골든글로브 등을 수상하게 된다.

이후 베르톨루치(Bertolucci)와 마지막 사랑(The Sheltering Sky), 리틀 부다(little buddha)에서 두번 더 작업했으며, 올리버스톤(Oliver Stone)의 와일드팜,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의 하이힐, 브라이언 드 팔마(Brian De Palma)의 스네이크 아이즈 및 팜므파탈의 음악도 작곡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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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라이프
1990년대 작업

이어지는 사운드트랙 작업 등으로 유럽과 미국에서의 작업이 많아짐에 따라 일본에 거처를 두고 살기 힘들어진 사카모토는 1990년,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된다. 이듬 해 걸프전쟁이 벌어지고 전쟁에 대한 분노를 담아 Heart Beat를 발표한다. 그 뒤 레코드 회사를 옮기면서 대중적인 것, 잘 팔리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에 Sweet Revenge, Smoochy 등의 앨범을 만들었으나 세상은 전혀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낙담하여 이에 대한 반발과 함께 르완다 분쟁에 대한 문제 제기를 위해 클래식풍인 Discord를 만드는 등의 시도를 하기도 했다.

1999년 사카모토의 첫 오페라 라이프는 도쿄와 오사카에서 일곱 번의 매진 공연으로 시작되었다. 이 야심찬 프로젝트에는 호세 카레라스, 살리프 케이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살만 루시디, 피나 바우 슈, 달라이 라마, 프랑크푸르트 발레단 멤버 등 100여 명이 관여했다. 사카모토는 로버트 윌슨과의 첫 번째 협업인 THE DAYS BEFORE: Death, Destruction & Detroit III, 그리고 일본에서의 첫 No.1 싱글 피아노곡 Energy Flow를 발표하며 1999년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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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sm
2000년대 작업

2001년에는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카를로스 조빙(Antônio Carlos Jobim)의 집에서 모렐렌바움 부부와 보사노바 앨범인 Casa를 녹음하였으며, TBS개국 50주년 지뢰 근절 캠페인의 일환으로 Zero Landmine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는데 이를 통해 오리콘 차트에서 두 번째 No.1 싱글을 기록했다.

2002년에는 영화 Femme Fatale(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Derrida(샌프란시스코 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 수상작), Alexei & the Spring(베를린 국제 영화제 Berliner Zeitung 독자상 수상작)의 사운드트랙을 발표하는 등 수많은 영화에서 그의 음악을 들어볼 수 있었다.

2004년에는 21세기 들어 첫 앨범인 Chasm을 발표하였는데 2001년 미국 9.11 테러를 계기로 세계의 벌어진 틈을 통감하고 분노에 휩싸인 채 만들어낸 앨범이다. 이 무렵에는 칼스텐 니콜라이와 크리스티안 페네스 등 젊은 사람들과의 협업을 통해 좋은 자극을 받게 된다.

2009년 3년 만의 솔로앨범 Out Of Noise를 발표하고 전국투어를 추진했으며, 자서전 '류이치 사카모토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를 간행하였다. 2014년 인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였으나 이를 극복하고 첫 복귀작인 야마다 요지(山田洋次) 감독의 어머니와 살면(母と暮せば) OST를 작곡하였고, 레버넌트의 OST를 작곡하여 골든 글로브상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2017년에는 8년만의 솔로앨범인 Async를 발표하였고, 한국영화 '남한산성'과 애니메이션 '안녕,티라노'에도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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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돈나 Rain
음악외적 활동

사카모토는 음악 외적으로도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Merry Christmas Mr. Lawrence, The Last Emperor, 마돈나의 Rain 뮤직 비디오 등에 출연한 적이 있으며, 아벨 페라라(Abel Ferrara)감독의 New Rose Hotel에 크리스토퍼 월켄(Christopher Walken), 윌렘 데포(Willem Dafoe)등과 함께 출연하는 등 연기자로써도 활동하였다.

또한 바니스 뉴욕(Barney's New York), 패션 디자이너 안토니오 미로(Antonio Miro), 의류브랜드 갭(Gap)의 모델로 활동하였으며, 세계적인 유명잡지에 남성복 모델로 모습을 비추기도 하였다. 1997년에는 스프라우즈(Stephen Sprouse)가 패션계로 성공적으로 복귀한 98년 봄 쇼에서 DJ로도 데뷔했다. 어쩌면 이렇듯 실생활에서 엿보이는 다방면의 변신이 그의 음악을 풍성하게 하고 다양하게 다듬어 주는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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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나미 피아노
소리에 대한 탐구, 사회활동

그가 도쿄의 고등학생이었을 때 통근열차를 타고 학교에 가야 했다. 승객들은 항상 꽉 차서, 움직일 수 없는 10대의 사카모토가 할 수 있는 일은 듣는 것 뿐이었다. 그는 기차가 만들어 내는 10여개 이상의 다양한 소리를 세어보며 즐거워 했다. 종종 그의 창조 과정은 즉흥적으로 시작되며, 그는 자신의 접근 방식에 대해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귀를 열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음악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잘못된 음표가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를 얻는 올바른 방법일 수도 있다. 실제로 오랜 친구 Alva Noto와 함께 한 2016년 라이브 즉흥 작곡 Glass에 영감을 준 것은 건물이었으며, 유리와 강철로 된 필립 존슨의 글래스 하우스를 악기처럼 연주하였다.

스테판 노무라 슈블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Coda에서 그는 눈 녹는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북극으로 간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참사를 촉발한 쓰나미의 여파로 미야기 현에서 발견된 '죽은' 피아노를 연주한다. 사카모토는 Coda에서 "우리 인간은 '피아노'가 음정이 맞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건 정확하지 않습니다. 물질은 자연 상태로 돌아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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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 페어웰

이러한 소리의 관측은 단지 미적인 것만은 아니며, 사카모토의 환경 및 행동주의 작업과 병행하여 진행된다. 그는 반핵 운동가이자 산림 개간과 탄소 상쇄에 관여하는 more trees 프로젝트의 창시자다.

90년대에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면서 정말 두려웠습니다. 내 나이의 막내 아들을 상상하고 그 때의 세상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본래 내성적인 그는 그의 사회적 명성을 유용한 것으로 바꾸는 방법을 발견했다. 스톱 롯카쇼(Stop Rokkasho) 프로젝트를 통해 롯카쇼무라의 핵연료 재처리 공장 방사능 오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모어 트리즈(More Trees) 프로젝트에서는 기존의 삼림을 보호하고 새로운 삼림을 심어 탄소 배출의 균형을 잡고자 했으며, 기후변동의 실태를 세상에 전하는 케이프 페어웰(Cape FareWell)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사카모토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가 탐구하는 음악 스타일의 광범위한 범위 - 심지어 한 앨범 내에서도 - 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핵심이다. 그는 음악적 경계 내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다른 문화에 대한 이 글로벌한 관점은 본성의 일부일 뿐입니다. 저는 장르, 카테고리 또는 문화 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싶습니다. 벽이나 경계를 만드는 대신 항상 다른 것을 결합하려고 합니다. 그건 해볼만 하고 또한 재밌는 일입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 예술, 행동주의를 연결하는 혈관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삶의 본질에 대한 그의 성찰이다. 사카모토는 2019년 초 "음악, 일, 삶은 모두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금 만들고 싶은 것은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난 음악입니다."

참고 : 류이치 사카모토 공식 홈페이지(sitesakam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