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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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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840회 작성일1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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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는 사라져도 음악이라는 실존은 남는다. 그런 힘을 가진 보물, 바로 류이치 사카모토가 이 세계에 남겨줄 유산이다. 10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시대의 음악가와 〈보그〉의 특별한 시간.      
 
59세의 거장은 어릴 적부터 지구 어느 곳에서든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현재 뉴욕에 살지만, 마음은 노마드족이다.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의 음악세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그는 한 점으로 시작해 곧고 긴 직선의 세계를 이어온 음학(學)자가 아니다. 군데군데 흩뿌려진 각각의 점에서 방사형으로 뻗어가는 탐험가다. ‘뉴 에이지’라는 흔한 단어는 이런 문제적 음악가를 카테고리화할 때 가장 골치를 덜 수 있는 해답인지도 모르겠다. ‘지그재그식의 예술’ 혹은 ‘동서양의 문화적 장벽과 클래식과 아방가르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무소속’이라는 설명보다 훨씬 간결하니까. 2000년 첫 내한 이후 다시 한국을 찾는 류이치 사카모토를 만나기 위해, 그의 매니저에게 편지를 보냈다. 돌아온 답변은 놀랍도록 정중했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지금 투어 일정으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그〉가 예술과 문화를 다루는 중요한 매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북미 투어를 마치고 일본 투어 중인 그의 스케줄을 감안하면, 그가 트위터에 할애하는 시간 정도만 내어 서면 인터뷰에 응해준다고 해도 행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번의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더 놀라운 답변이 뒤따랐다. “본디 인터뷰라는 것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얘기해야….”
 
류이치 사카모토가 한국에 도착한 날,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는 대낮에도 영하 10℃를 밑돌고 있었다. 그는 얼어 죽겠다고 했고, 건조해진 그의 손가락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주름져 있었다. 젊은 날의 실체는 오직 글과 사진과 음악을 통해 간접 체험할 수 있었던, 눈앞에 마주한 중년의 음악가. “저는 원래 유명해지는 걸 좋아하는 타입입니다. 그건 제가 만든 음악을 많은 사람들이 듣는다는 뜻이니까요.” 대화는 그의 커리어에서 지극히 ‘한 점’일 뿐인 영화 음악으로 시작했다. 198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상자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올해는 9개 부문의 상을 차지한 〈마지막 황제〉의 해”라고 공표하고, 동양에서 온 남자가 아카데미 작곡상을 거머쥐며 탄탄대로를 예고하던 때는, 30여 년 동안 화려한 역사를 써온 그에게도 분명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순간이었을 테니까.
 
“제가 처음 작업했던 영화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의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3개월 동안 아무런 터치를 하지 않았어요. 시작을 그렇게 했더니, 저는 영화 음악이란게 이렇게 내 멋대로 하면 되는 거구나, 생각해버렸죠. 그 후로는 영화음악을 맡을 때마다 매번 이게 끝이라는 심정으로 투덜거리면서 했습니다. 영화 작업을 하면 그 특성 때문에 요구되는 사항들이 많아서 심신이 고달파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도, 브라이언 드 팔마도 쉽지 않은 대상이었죠. 영화 감독이라는 존재가 원래 좀 어렵습니다.(웃음)하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영화가 완성되면, 재능 있는 감독들과의 작업이 확실히 흥분된다는 점만 기억되죠. 그래서 앞으로도 누가 좋은 제안을 해오면 응할 것 같습니다.”
 
최근 발간된 류이치 사카모토의 자전적 에세이〈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엔 그가 영화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와 〈마지막 황제〉에서 배우와 음악 감독의 역할을 겸했을 때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흥미로운 내용들이 등장한다. 〈마지막 황제〉의 촬영을 마치고 반 년이 지나서 갑자기 1주일 만에 영화 음악을 완성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거나(물론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류이치 사카모토는 ‘2주일’을 달라고 맞받아쳤다), 여전히 류이치 사카모토의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Rain’을 스태프들에게 처음 공개했을 때 다들 감탄해서 신이 났다거나, 하지만 시사회에서 완성된 영화를 확인하곤 작곡한 곡의 절반이 잘려나갔다는 사실에 까무러칠 뻔했다거나 하는 일화 등. 베르톨루치 감독은 “엔니오 모리꼬네는 어떤 음악이든 그 자리에서 당장 작곡했어”라는 말로 그를 약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몇 년 후 둘이 〈리틀 부다〉로 다시 의기투합한 걸 보면, 괴짜와 괴짜의 싸움에서도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주 무기’가 빛을 보는 일이다.
 
그는 피아노 천재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세 살 때부터 건반을 두드렸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개회식 무대에서 직접 오케스트라를 지휘해낸 이력까지 생각하면,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적 베이스는‘클래식’인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는 10대 때 자신이 드뷔시의 환생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클래식 중에서도 견고하고 건축적인 고전파가 아니라 새로운 구조를 열어젖힌 인상파의 시조에 매혹당했다는건 그의 세계를 이해하는 큰 힌트다.
 
이를테면 그는 정돈되고 체계적인 음대의 정규 교육을 받으면서 자유로운 영혼들을 좇아 미대생과 어울렸고, 비틀즈와 드뷔시의 음악을 처음 만나던 순간을 잊지 못하며, 존 케이지와 같은 현대 음악에 자극 받았다. 전 세계적으로 음악의 구조를 해체시키려던 60년대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흡수하면서(‘광대한 시야를 갖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해체한다’는 소개말은 그의 트위터의 프로필란에 쓰여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70년대 후반 그는 YMO라는 밴드를 결성해 전자 음악에 뛰어들었다. YMO는 해외 투어를 다니면서 스타 밴드로 떠올랐다. 마이클 잭슨과 에릭 클랩튼이 그들의 연주곡에 가사를 붙여 부르겠다고도 할 정도였다. 서양에서는 테크노 음악의 문을 열어젖힌 독일의 크라프트베르크 등으로 인해 뉴 웨이브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새 시대의 현대음악이라는 시류에 뛰어든 류이치 사카모토. 그는 음악이라는 언어로 혁명을 꿈꿨던 걸까?
 
“젊은 세대는 당연히 기성 세대가 만들어놓은 것들에 대해서 반항하고 싶어 합니다. 그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있는 현상이죠.‘혁명’이 한국말로도 변화보다 좀 더 높은 단계를 뜻합니까? 저는 정치가도 아니고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뮤지션일 뿐입니다. 물론 어릴 적부터 사람들이 정해놓은 정의들을 의심하는 부류긴 했어요. 예를 들어 신호등에 초록색 불이 들어왔을 때 길을 건너야 한다는 규칙조차 별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러다가 차에 치이면 안 되니까 현실적으로는 반항을 못했죠. (웃음) 그저, 세상에는 내가 결정하지 않은 것들을 세상이 정해놓은 대로 따르는 사람과 자꾸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류이치 사카모토가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와 〈마지막 황제〉로 칸과 아카데미의 레드 카펫을 밟기 전, 그는 이미 스타였다. 스타가 좋은 건 자기가 내키는 방식대로 결정해도 누가 뭐라 할 수 없다는 것. 그는 전통 음악에 팝을 접목시키거나, YMO가 하던 방식과는 전혀 달리 기계를 배제한 음악을 만들어내거나, 아예 오케스트라로 도배된 클래식 음반을 내기도 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작업할 일이 많아지자 뉴욕으로 이사를 했던 건 1990년의 일. 영화사가 많은 할리우드 대신 뉴욕을 택한 것도 ‘어디로든 가기가 쉬울 것 같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보통은 한 가지 일을 계속 파고들어야 신뢰를 받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가지 스타일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금방 질려버리는 사람이에요. 여러 가지 일들을 벌이고 싶고, 또 그렇게 살았습니다. 30여 년 동안 예측이 불가능한 커리어를 쌓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저를 좋아해주는 사람들도 걸러졌어요.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사카모토는 원래 저런 사람이잖아’하고 생각해줍니다. 어차피 그 모든 게 저라는 한 사람이 벌이는 일이에요. 스타일은 다를지언정 결론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지그재그식의 여정을 그려가는 음악가의 후반부에는 어떤 화두가 기다리고 있었을까? 오랫동안 음악이라는 소리의 집합체를 다뤘다면 이제 소리 자체에 대한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 소음이고, 무엇이 음악인가. 건반이 내는 아름다운 음의 여운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미세한 소리 속으로 사라진다면, 어느 순간부터가 소음이고 어디까지가 음악인가. 피아노 연주에 여러 악기와 자연의 소리까지 더해 소리의 질감을 살린 2009년의 음반〈Out of Noise〉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가 교조적으로 청자들을 가르치려 하거나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던 건 아니다. 그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리들이 있기 때문에 음악으로 만들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음악이라는 매체는 언어와 달라서 메시지를 심어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뭔가를 전달하겠다는 생각으로 음악을 만들진 않아요.”
 
세기가 바뀌면서 류이치 사카모토가 관심을 둔 또 하나의 화두는‘환경’이다. 그는 장기간 숲을 임대해서 나무를 심고 삼림을 보존할 수 있는 재단을 설립했다. 녹음이나 투어를 할 때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의 상쇄를 위해 필요한 비용을 지불한다. 그가 이산화탄소를 없애는 데 필요한 비용을 낸다는 건, 숨쉬는 인간으로 태어나 지구에서 사는 대가를 치르겠다는 뜻이다. “마흔 살 이전에는 철저히 나만 생각했습니다. 마흔 살 이후 내 몸이 노화되는 걸 느끼면서, 나와 내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군요. 저에겐 네 명의 자식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제 나이가 됐을 때, 지구 온난화나 여러 환경 문제들 때문에 삶이 어렵지 않도록 이 세상을 지켜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환경보호에 동참하고 있는 겁니다.”
 
1월 9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그의 공연이 열렸다. 여느 공연과 달리 공연장의 조명이 약 5분에 걸쳐 서서히 어두워졌다.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이 핀 조명 하나 밝혀지지 않은 새까만 세상에 갇혀버렸을 때, 류이치 사카모토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등장했다. 스크린에서 새어 나오는 최소한의 빛,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형체. 그는 쇠줄로 피아노의 현을 긁고 손가락으로 현을 뜯으며 간간이 건반을 짚었다. 물이 졸졸하고 흐르는 소리가 배경음으로 잔잔하게 깔렸다. 그가 그린란드에서 녹음해온 소리였다. 〈Out of Noise〉를 만들고 있을 때, 그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환경보호 활동의 일환으로 그린란드에 방문한 적이 있다. 자연에 압도된 그는 그곳에서 바람 소리며 물 흐르는 소리를 녹음해와 음반을 만들 때 썼다. 피아노 현의 마찰음과 물 흐르는 소리에서 심해의 빙하가 갈라지는 장면이 연상됐다. 물론 이런 전위적인 연주만 계속됐다면 그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도 난감했을 것이다. 어둠 속에 갇힌 관객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소리를 30여 분 들려준 그는, 최신앨범인 〈Playing The Piano〉의 곡들과 잘 알려진 곡들을 연주하며 우리를 달랬다.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 한 대, 그의 프로그래밍에 따라 자동적으로 연주되는 피아노 한 대. 열 손가락의 한계는 풍부한 화음으로 극복됐다. 그가 그린란드의 자연 앞에서 압도 당했듯, 관객은 이 피아노의 장인에게 압도 당했다.
 
그를 만나기 전, 무수한 인터뷰를 겪었을 예술가임을 감안해 차라리 아무도 던져보지 않았을 가벼운 질문을 하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류이치 사카모토에게 뉴 발란스란?(“10년 동안 운동화만 신고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한 가지를 고집하면 질리는 타입이라 이제는 구두를 신지요.”) 머리 염색을 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은발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15년 전, 완전히 은발로 염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땐 아무도 그런 스타일을 시도하지 않았을 때라 나름 멋있어 보였어요. 지금은 자연적으로 은발이지만….”) 소녀시대를 아는가? (“뉴욕에 살고 있지만, 신한류 현상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소녀시대와 카라 정도는 압니다.”)
 
가볍게 치고 빠지는 대화를 예상했지만, 그는 소녀시대를 안다고 말할 때조차 워낙 진지했다. 탈색하지 않아도 하얗게 센 그의 머리와 주름진 손을 보며(이제 60세 아니냐고 묻자 그가 59세라고 정정해줬다), 나는 언제나 청춘을 사는 예술가도 ‘늙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어서 마음이 쓰려왔다. 스스로 자신은 혁명가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전복을 꿈꿨던 젊은이, 떠도는 실험가, 계획도 거창한 이유도 없었던 엉망진창의 자유인, 뼛속까지 예술가. 그는 ‘아티스트는 영원히 철들지 않는다’는 세간의 말에 동의할까? 아티스트에게 결혼과 가정이란 어떤 의미일까? 입을 떼기까지 그는 꽤 고민했다. “저는 결혼에 두 번 실패했기 때문에 가정을 잘 꾸려나갔다고 말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아티스트는 영원히 철들지 않는다’는 말엔 옳은 부분이 있어요. 제가 이제껏 만났던 사람들도 모두 재능 있고 훌륭했지만, 한편으로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었거든요. 어른이 된다는 건 사회가 원하는 대로 순응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티스트는 대개 어떤 룰을 깨부수려고 하는 존재들이에요. 사회의 내부가 아니라 가장자리에 있어야 하는 존재, 그게 아티스트의 본분 같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탐구하는 앨범까지 냈던 그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었냐고 물었다. “그 고민을 10대 때부터 했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생각 중이에요. 사자나 원숭이는 음악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이라는 동물만이 음악을 하지요… 그런데도 아직 해답이 보이지 않네요.” 문득 그의 에세이에서 읽은 구절이 떠올랐다. 그린란드에 갔을 때 그는 자연의 거대함에 압도 당한 나머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한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 주먹감도 안 되는 존재. 어쩌면 이미 없어도 좋을 존재’. 그 아름다운 무력감은 자연뿐 아니라 예술의 영역에도 고스란히 적용해볼 수 있다. 인간이 환희에 심장 뛰도록 만드는 것도, 인간을 한순간에 묵사발로 만드는 것도 예술이다. 어쩌면 이미 없어도 좋을 존재인 우리들은 으스러지기 전에 향유할 수 있는 많은 목록들을 향유하며 살고 싶어 한다. 그 목록들 중에 위대한 음악가들이 축적해온 음악이 있다. 언젠가 우리는 사라져도 음악이라는 실존은 남는다. 그런 힘을 가진 보물, 바로 류이치 사카모토가 이 세계에 남겨줄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