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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건축하는 사람 '류이치 사카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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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029회 작성일1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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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선 그리 크게 대접받지 않는 듯하지만 한국엔 팬이 많은 피아니스트 유키 쿠라모토가 2번에 걸쳐 내한공연을 했을 때, 그리고 저 유명한 퓨전재즈그룹 T-Square마저 내한공연을 가졌을 때, 나처럼 고급문화 혹은 세련된 문화에 대한 적쟎은 허영기 혹은 컴플렉스를 가진자들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한번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놈의 류이치 사카모토는 한국에서 공연 안하나?' 영화음악가로서의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에 대해 일반론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식상한 주제가 되었을 만큼 그에 대한 영화음악 매니아들의 관심과 집착은 2000년 현재 이미 '광증'의 단계를 넘어서 있었다. 이렇다할 프로모션 한번 제대로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럴까? 일본의 대중음악가로서 세계무대를 주름잡는 카리스마가 실제이상으로 과대평가된 탓일까. 아니면 동서양을 넘나들며 어느 현대의 대중음악가보다도 자신만의 스타일과 패션을 흔들림 없이 균형있게 유지하는 그에 대한 정당한 경외감일까. 어쨌든 문제적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가 4월 28일 드디어 한국 공연을 하고 갔다. 새 앨범 [Back to the basic]의 프로모션을 겸한 이 공연에서 류이치 사카모토는 특유의 정적이면서도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무대를 가꿔 보여주었다. 세 개의 건반악기가 나란히 놓여져 있어 서로 다른 질감의 건반연주가 펼쳐질 것임을 예감케 하는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한 세팅부터가 그다웠다. 마치 세 개의 방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기호학적 구조의 가옥 속으로 그를 따라 들어가게 될 것 같은 분위기… 첫 번째 방은 신디사이저와 샘플링, 그리고 디제잉을 통해 이질적인 사운드들을 입체적으로 조화시키는 퍼포먼스가 벌어진다. 일본의 전통소리와 심장박동을 연상케하는 비트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바람처럼 들려오는 어쿠스틱 피아노 소리. 마치 연금술사처럼 섬세하게 소리의 잡동사니들을 가르고 자르고 이어붙이는 그의 손끝 하나하나에 청중들의 시선은 모아졌고 장내에는 평온하지만 숨죽이는 긴장감이 지속된다. 'Spinning'이라 이름 붙여진 이 첫 번째 스테이지는 이후에 펼쳐질 류이치 사카모토만의 고요와 열정의 어쿠스틱 피아노 감상실로 들어가기 위한 매우 까다로운 통과의례마냥 15분이 넘게 지속되었다. 마치 20년전 신디사이저 3대로 편성한 그룹 'Yellow Magic Orchestra'를 결성, 전자음악 실험의 마력을 보여주던 현란한 사운드의 세계를 더 깊이 심화시킨 듯한 무대였다. 그리고 무대 백스크린에는(류이치 사카모토의 공연에는 언제나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한 영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희미하고 심플한 단어와 도형의 다음과 같은 나열이 음악 레퍼터리와는 무관하게 두시간의 공연을 채우며 하나의 패러그래프를 완성해가며 그의 목소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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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이치 사카모토에게 있어서 연주란, 그리고 공연이란 청중과의 기호학적 대화의 일종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길고 짧고 크고 작고 네모지고 둥근, 소리들의 입자로 하나의 집을 짓는 행위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작곡가이자 연주가이자 무대 퍼포먼서로서의 그는 철저하게 대위법적인 구성을 실천하는 사람인 것이다.
피아노의 소리가 가진 맑음과 탁함, 열림과 닫힘, 우울함과 명랑함, 따뜻함과 차가움을 다 보여주는 그의 연주는 솔로 연주면서도 두사람의 류이치 사카모토가 연주하는 연탄곡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의해 특별한 기제를 통해 입력된 연주를 피아노 스스로 수행하면 류이치 사카모토는 또하나의 복제된 류이치 사카모토로서 피아노 앞에 앉아, 자동연주장치 속에 존재하는 자기자신과 호흡을 맞춘다. 국내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이 연주장면은 샘플링이 일반화된 지금 음악테크놀러지의 발달을 확인하는 의미라기보다는 한 음악가의 외롭고도 단호한 자기투영의 감동이 느껴졌다.
또한 널리 알려진 영화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를 연주할 때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무대 뒤 전면을 커버하는 단순하지만 이그조틱한 조명효과가 영화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스케일과 감각을 실감나게 했다. 이외에도 그의 연주마다 조금씩 다른 조명디자인이 음악의 색깔과 무늬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해주어 청중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이는 기존 콘서트에서 볼 수 있는, 컬러풀하고 현란하기만 한 조명연출과는 다른 절제와 깊이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적 궤적을 영화음악 중심으로 정리해보자.
1952년 동경 태생의 그는 동경예술대학 작곡과에서 전자음악을 공부했고 베토벤과 비틀즈를 동시에 동경했다. 앞서 얘기한 Y.M.O. 활동이 그를 유럽음악무대에서 명실상부한 스타로 만들었고 이때 만난 데이빗 실비앙과는 오랜 음악파트너가 된다.
1983년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화 [Merry Christmas Mr.Lawrence]에 배우로 참여하면서 음악까지 맡아 시작된 필모그라피는 아카데미 음악상에 빛나는 [마지막 황제](1987), [The Handmaid's Tale](1990), [마지막 사랑 The Sheltering Sky](1990), [High Heels](1992),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1992), [리틀 부다 Little Buddha](1994), [Love Is Devil](1998), [스네이크 아이즈 Snake Eyes](1998), 그리고 최근에 국내에 소개된 [철도원](1999)에까지 이르게 된다.
언제나 류이치 사카모토의 지지자들이 첫손에 꼽는 [마지막 황제]에 나오는 푸이의 테마 'Rain'은, 이혼을 원하고 떠나버린 후궁의 뒷모습을 쓸쓸히 바라보다가 햇볕 밝은 날 쏟아지는 빗속에서 무력하게도 혼돈과 걷잡을 수 없게 질주하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황제의 심리를 적절하고도 고급스럽게 묘사하여 긴 여운을 남겼다. 삶과 사랑의 의미를 찾아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존 말코비치, 데브라 윙거 부부의 허무한 여정을 보여주었던 [마지막 사랑 The Sheltering Sky]의 테마는 마치 에릭 사티나 사뮤엘 바버가 들려주었던 미니멀한 스트링 앙상블을 연상케 하는 아름답고 슬픈 음악이다.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사막의 방대하고 고독한 자연 속에서 울려나오는 어떤 운명의 힘,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절대고독을 연출한 베르톨루치 감독의 동양적 세계관이 사카모토의 음악 속에 맑은 녹차처럼 담긴다.
한국공연 레퍼터리 중에서 가장 호응을 받은 곡 가운데 하나가 바로 [Merry Christmas Mr.Lawrence]의 테마였는데, 오시마 나기사 감독에 데이빗 보위, 류이치 사카모토, 기타노 다케시의 출연이라는 크레딧만으로도 영화를 보지 못한 국내 매니아들에게 관심 1위기도 하다. 게다가 그가 맨 처음 만든 영화음악이자 신디사이저의 대가로서 진면목을 일찍이 보여준 음악으로서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월드뮤직 아티스트다운 신비로움이 있다. 허공에 날리는 눈송이를 연상케하는 전반부 주제와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후반부의 힘이 마치 장자의 도가세계를 음악으로 체험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게 한다.
공연과 함께 국내에 처음 선보인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영화음악 매니아들에게는 필청의 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전에 [1996] 앨범을 통해 피아노 트리오로 편곡된 버전으로 만족해야 했던 그의 한국고객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발매가 아닐 수 없다.
음반유통사의 상업적인 마켓팅 전략이 아니었다면 동시에 만날 수 없었을 세 장의 앨범출시([Cinemage]까지 포함해서)와 공연을 오랜 기다림 끝에 경험하면서 필자와 비슷한 성향의 애호가들은 이런 생각을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 우리나라엔 저런 아티스트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류이치 사카모토보다도 더 재능 있을지도 모를 멀티 아티스트를 알아보고 보호하고 대접하고 키워내는 안목과 스케일이 우리 음악시장 안에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까?
행복하면서도 우울한 느낌을 갖게 해준 류이치 사카모토가 만든 음악의 집으로의 방문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지구촌 단위의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그가 말한 월드뮤직에 관한 하나의 넋두리를 한번 더 음미해본다.
"난 머리 속에 일종의 문화적 지도를 갖고 있다. 거기서 난 모든 다른 문화들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그래서 전통음악에 새로운 테크놀러지를 가미해 새 옷을 입히는게 재밌다."
글 / 강일철 (영화음악 칼럼니스트)